인물/팀
박범학 장로님은 1941년생으로 일원동 지역에서 태어 나셨다. 당시 일원동 수서동 지역은 농사를 짓는 인구가 대부분이었고 씨족마을 형태의 집성촌이 무리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태어 나셔서 해방도 경험하고 육이오 전쟁도 경험 하셨다. 그 후 이곳 수서지역에 수서교회가 첫 씨앗을 품게 되었다. 첫 교회 자리는 일원동에 가까운 지역에 천막교회가 세워졌다. 명동에 위치한 영락교회에서 파송한 이예구 전도사님이 처음 부임 하셨다. 초등 학생 나이였던 장로님은 전도사님이 해 주는 말이 너무 좋아서 교회에 나오기 시작 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불교를 믿고 있었고 유교적 가치관이 많이 남아 있던 시대였다. 장로님은 어린 나이에도 농사일을 도와야 했기 때문에 주일이나 낮시간에 교회엘 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일이 다 끝난 저녁시간에 저녁밥을 안먹고 부모님 몰래 문소리도 안들리게 조용히 집을 나와서 교회로 향했다고 한다.
천막교회 시대엔 문의사라는 의사 선생님이 한분 계셨는데 교회운영에 큰 힘이 되어 준 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강부금 권사님이 계셨는데 이 두분이 교회 살림살이에 큰 공헌을 하신 분으로 기억 한다고 했다. 이후 이관우 정만오 김봉길로 교역자 분들이 바뀌셨는데 긴 시간을 머물지는 않으셨다고 한다. 첫 부임하신 이예구 목사님 가정은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환경적으로나 여러가지로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천막으로 만든 교회안에 초롱불을 피워 놓고 멍석깔고 예배를 드린 시대였고 사택 하나 제대로 갖추지도 못했고 농사짓는 곡식들을 나누어 가며 함께 살아 갔던 기억이 난다고 하셨다.
사진_예뜨락에서 옛이야기를 전해주시는 박범학 장로님
그 과정중 지금 일원터널 방향에 위치하고 있던 천막교회는 60년대로 접어 들면서 대치동 방향에서 오던 성도들과 일원 수서동 성도들의 숫자가 늘면서 교회가 분리 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 수서동 방향에 교인의 땅이 있어 그곳에 목조로 처음 교회 성전건축을 일구게 됐는데 대략 60년대 즈음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당시 새마을 운동 등으로 경제발전이 일어나면서 수서 일원 땅 일대도 뚝방이 생기는 등 변화가 일기 시작한 때였다고 한다. 그후 다섯번째 목회자로 지금의 황명환 목사님이 부임하시게 되면서 수서교회는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맞이하게 됐다.
사진_ 옛기억을 설명하기 위해 메모해 오신쪽지
황명환 목사님은 당시 전도사 신분으로 오셨는데 황목사님이 오신 후 처음으로 장로가 세워졌다. 박범학 장로님과 몇분이 함께 추대 되었고 교회의 기틀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이렇게 성장할 것이라고는 그당시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하신다.
"나는 배운것도 없고 건강도 않좋아서 크게 자랑 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무언가 잘 만드는 재주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재주로 여러 일을 할 수 있었고 독학으로 도장을 파는 것도 배웠지요 60년대엔 리비아 플랜트 공사장에 3년간 다녀오기도 했답니다."
사진_ 교회앞에서
장로님은 수서교회가 처음 태어 날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하나님의 성전을 지켜오신 유일무이하신 분이셨다. 장로님의 특별한 신앙관이나 비전이 있으신지 여쭈었더니 "저는 그저 교회 오는 것이 좋고 성실하게 예배드리는 것으로 항상 만족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씀 하신다. 지금은 수서지역을 떠나 분당쪽에 거주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슬슬 걸어서 집까지 가시는 것을 즐기신다고 하신다. 오늘도 직접 만드신 지팡이를 들고 오셨다. 이렇게 걸으면서 사람들도 만나고 이야기도 하고...
사진_ 직접 만드신 나무 지팡이를 들고 계신 장로님
오늘 박범학 수서교회 초대 장로님을 만나뵙고 하나님께서 참 귀하게 여기실 분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70년이 넘는 기간동안 오롯이 예배를 지킴만으로도 큰 기쁨일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증인이시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교회의 크고 작은 일들을 평가하고 나의 시선으로 평가하려는 생각들이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인가 반성하게 되었다. 사진/글 김대석 촬영팀장
댓글